조각들



EN/KR

파편





















사람마다 세계를 배우는 방식은 다르다. 누군가는 언어에서 세계를 배운다고 하지만, 나는 먼저 몸으로부터 배웠다. 목사였던 아버지의 집에서 게이인 아들의 몸은 기도와 침묵, 성스러움과 욕망이 한 공간 안에서 스치며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그 시절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은 단순히 갈등이라고 부르기엔 복잡했다. 충돌과 반항이 있었고, 동시에 이상한 호기심도 있었다. 금지된 것들은 더 또렷하게 다가왔고, 신성한 것들은 오히려 살결처럼 가까웠다. 종교와 퀴어, 규범과 이탈, 신성모독의 상상과 교차성의 감각이 뒤섞이면서 내가 세계를 읽는 방식은 조금씩 기울어졌다. 불안의 기운이 배어 있었지만, 그 기울어짐은 나를 다른 자리로 미끄러지게 하는 조용한 안내자이기도 했다.

그때의 경험들은 자연스럽게 표현의 행위로 이어졌고, 작업 이전에 이미 하나의 사유 방식이 되어 있었다. 나는 몸의 기록을 따라가고, 파열의 흔적을 읽고, 감각의 구조를 뒤집어 보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2015년 런던에서의 석사 과정 동안 썼던
DIONYSIA: The True Story of My Relationship with My Body (2015)는 그 여정의 첫 장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쌓여 온 몸의 경험들을 더듬어가며, 나의 마조히즘적 에너지—파괴와 창작이 동시에 한자리에 머무는 힘—의 기원을 탐색하려는 시도였다. 몸이 어떻게 자신을 대상화하면서도 다시 회복하는지, 종교와 감정, 쾌락의 경계를 오가며 남긴 관찰의 기록이었다. 이후 그 내용을 자전적 소설의 형식으로 다시 구성한 When the Water Blushed (2021)로 확장하며 또 하나의 장면을 만들었다.

이 글은 그 질문의 뒤편에서 이어져 온 또 다른 층위를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기원을 다시 파헤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작업들이 어떤 장면을 펼쳤는지, 그리고 어떤 구조를 실험하고 있었는지를 천천히 돌아보는 과정에 가깝다. 몸에서 출발한 감각적 사유가 무대와 군중, 희생과 규범, 욕망과 파열로 확장되어온 긴 여정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보려는 기록이기도 하다.

가장자리
     — Paradise Lost
세계의 균열은 언제나 조용한 가장자리에서 먼저 시작된다. 중심은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주변의 신체들이 먼저 흔들리고 그 흔들림이 시간이 지나 구조 전체의 떨림으로 번져간다. 나는 이런 장면들을 몸을 통해 조금씩 배웠다. 규범의 압력은 늘 바깥에서 먼저 감지되었고, 금기는 주변에서 먼저 느슨해졌다. 특정한 몸들은 그 진동을 가장 먼저 받아내는 자리로 놓여 있었다.

무대의 신체 또한 이 가장자리의 연장선에 있다. 무대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사회가 미처 다 감당하지 못한 감정들이 모여 가장 쉽게 흔들리는 층이 있다. 그 위에 선 몸은 군중의 기대와 불안을 빠르게 흡수하고 규범의 무게를 예민하게 받아낸다. 그래서 무대 위의 신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사회의 감정이 어떤 흐름으로 움직였는지 기록하는 감각 기관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규범은 중심에서 말해지지만, 정작 중심에서는 그 모양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는다. 규범의 윤곽은 주변에서만 읽힌다. 어떤 몸이 과도하게 소비되거나 비정상적인 성화의 대상이 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폭력에 노출되는 순간에서야 사회가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희생해 왔는지가 드러난다. 그래서 주변에 놓인 신체들은 오랫동안 사회의 ‘시험대’처럼 기능해 왔다. 퀴어의 몸, 아시아적 몸, 아이돌의 몸처럼 특정한 범주 안에 묶인 신체들이 특히 그 자리에서 오래 머무른다.

초기 작업들을 다시 보면, 그때는 어떤 개념도 없이 그저 몸의 감각을 따라가고 있었던 것 같다. 설명하기 어려운 떨림이나 불편함 같은 것들이 먼저 앞서 있었고, 나는 그 감각을 붙잡기 위해 자연스럽게 영상과 퍼포먼스로 손이 갔다. 그 장면들이 왜 필요했는지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안에 이미 ‘경계의 몸’이라는 질문이 조용히 숨어 있었던 듯하다. 특정한 신체가 왜 먼저 흔들렸는지, 어떤 표면이 유난히 불안하게 보였는지 그 이유들이 이제야 조금씩 읽힌다.
그래서 초기 작업들은 이론의 출발점이라기보다, 말보다 앞서 있었던 감각의 기록에 가까웠다. 아마도 어떤 몸이 경계에서 흔들릴 때 그 떨림이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먼저 장면을 향했고, 그 장면들이 시간이 지나 사유를 불러내기 시작했다.

그 첫 시도가 Paradise Lost (2016)Me Gustas Tú (2016)였다. 나는 이 작업들을 로마의 성당과 영국 해군 잠수함에서 촬영했다. 바티칸의 성당은 서구 제국주의와 종교 권력이 함께 응축된 공간이었고, 잠수함은 식민지 확장과 군사적 통치의 잔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였다. 이런 공간은 그 자체로 권력의 중력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속에 놓인 동아시아적 신체는 자연스레 경계의 긴장을 드러냈다.

남성의 몸으로 여성 아이돌의 목소리를 재현할 때 생겨나는 어긋남, 제국의 건축물 가운데서 울리는 케이팝의 멜로디, 해군 잠수함 위에서 반복되는 아시아적 춤의 동작들.이 낯선 조합과 진동이야말로 내가 오래전부터 느껴왔던 경계의 감각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나는 권력의 구조를 정면에서 부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 구조가 흔들리는 순간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에 가까웠다.

이 경험은 나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경계의 몸은 언제 흔들리는가.
그리고 그 흔들림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이 질문은 내 작업 전체의 뼈대가 되었고, 이후 여러 방식으로 다른 장면 속에서 다시 나타났다.







OO되기
     — Kiss of Chaos
경계에서 먼저 흔들리는 몸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그 흔들림이 하나의 감각으로 이어지곤 한다. 경계의 몸은 한 자리에 머물기를 어려워하고, 다른 형태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자신조차 모르는 방향에서 서서히 다시 만들어진다. 나는 그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것을 ‘OO되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되기는 정체성을 바꾸는 선언이라기보다, 몸이 흔들림을 따라가며 자신을 다시 조립해 보려는 느린 실험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 감각이 작업 전체의 흐름을 만들어 왔다.

어린 시절, 소년의 몸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걸그룹의 춤과 목소리를 강하게 욕망했던 때가 있었다. 그 욕망은 단순한 충돌이라기보다 금지와 호기심이 겹쳐 흐르는 작은 방향 같은 것이었다. 정상성의 구조 안에서 스스로를 실패자로 느낀 적도 있었지만, 그 실패가 다른 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감각은  나중에야 찾아왔다. 유럽에서 공부하며, 남미의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중심처럼 보이던 질서가 세계의 전부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자주 확인했다.비유럽 여러 지역의 샤머니즘은 규범이나 계급보다 몸의 떨림을 먼저 믿었고, 그 믿음은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다가왔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그 반응이 세계를 다시 배열하는 방식은 퀴어 신체에도 오래 존재해 왔다고 느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나는 아버지의 신학적 중심성과 대결하기 위해 다른 방식의 신체를 만들기로 했다. 설명하고 해석하는 언어 대신, 무당의 신체와 케이팝 아이돌의 표면을 함께 지닌 존재인 HornyHoneydew를 만들었다. 이것은 어떤 전략적 위장일 수도 있지만, 경계의 신체가 자연스럽게 취한 ‘다른 되기’의 형태였다. 샤먼 되기, 아이돌 되기, 제물 되기. ‘OO 되기’는 나에게 정체성을 선언하는 것이기보다 억압적인 구조 바깥에서 몸을 다시 고안해 보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Purple Kiss (2018)는 그 움직임이 처음 형태를 갖춘 장면이었다. 무속의 신체와 케이팝의 신체를 하나의 프레임 안에 겹쳐 놓았을 때, 나는 단순한 혼합을 시도한 것이 아니었다. 샤먼의 몸이 지닌 다층적 젠더성, 에너지의 이동, 상태의 전환 같은 요소는 이미 퀴어 신체의 오래 수행해온 전환의 리듬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경계에 놓인 몸은 늘 이런 전환의 기술을 가장 먼저 익힌다. 자신을 옮기고, 형태를 바꾸고, 기존의 구조에서 조용히 벗어나는 능력. Purple Kiss는 그 리듬을 몸으로 따라가 보고 싶었던 첫 번째 시도에 가까웠다.

Kiss of Chaos (2020)에서는 이러한 ‘되기'가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 서구에서 오랫동안 미신으로 치부되어 배제되었던 북아시아 샤머니즘의 감각적 기술—떨림, 노래, 불, 전환의 몸짓—을 케이팝 뮤직비디오의 매끄러운 표면 안에 놓아두며 두 체계가 서로를 통과하는 장면을 만들고자 했다. 여기서 불은 형벌이 아니라 통과의 신호였고 세계를 이동시키는 작은 매개가 되었다. 샤먼의 몸은 세계를 둘로 나누지 않고, 이원적 질서를 흔들며, 금지된 감각을 조용히 개방한다. 그 몸짓은 퀴어의 존재 방식과도 닮아 있다. 구조에서 벗어나고 어긋나는 자리에서 새로운 감각의 배열을 만들어내는 능력. Kiss of Chaos는 그 능력을 스스로의 신체에 적용해 본 하나의 실험이었다.

돌아보면 이런 ‘되기’들은 정체성을 바꾸기 위한 연출이라기보다, 경계에 놓인 몸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감각적 방식에 가까웠다. 아이돌이 되는 몸과 샤먼이 되는 몸은 서로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같은 경계 위에서 다른 방향으로 흔들리는 두 개의 파장처럼 느껴졌다. ‘되기’는 의지나 선언보다 감각의 재배치에 더 가까운 움직임이다. 들뢰즈가 말한 '되기’의 흐름도, 도나 해러웨이가 이야기한 ‘함께-되기' 역시 특정한 타자와 얽히며 발생하는 변형의 과정이다. 내 작업 속의 ‘되기’ 또한 그런 흐름들과 닿아 있었다. 샤먼의 몸짓, 아이돌의 표면, 퍼포먼스가 만든 리듬 같은 것들과 얽히며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냈다. 그 흔들림이 작업의 기반이 되었고, ‘OO되기'는 규범의 균열을 드러내는 하나의 몸의 언어로 남아 있다.







봉헌
     — Dear Fear
어떤 몸은 특정한 자리에 놓였을 때 비로소 세계의 구조를 더 정확하게 감각한다. 이런 감각은 개념보다 몸을 통해 먼저 찾아왔다. 특히 BDSM 플레이에서 서브미시브로 머무를 때 그 감각은 가장 또렷하게 다가왔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된 신체는 밖에서 보면 멈춰 있는 몸처럼 보이지만, 그 자리에서 묘하게 장면의 중심이 생긴다. 겉으로 보이면 나는 권력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보인다. 지시를 따르고, 움직임을 허락받고, 구속된 자세로 가만히 놓여 있는 몸처럼 보이지만,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공간의 기류와 감정의 방향을 끌어당긴다. 감각은 그 자리에서 미세하게 확장되고, 그 확장은 권력의 균형을 조용히 어긋나게 만든다. 명령을 내리는 쪽은 오히려 그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움직여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지배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묶인 몸에서 권력의 재배치가 일어난다.

그 반전의 순간은 여러 번 찾아왔다. 구속된 몸이 하나의 표면처럼 작동하며 감각의 흐름을 바꿀 때가 있었고, 고통이 통제의 언어를 무르게 만들거나, 쾌락이 규범의 틀을 미세하게 비틀어 놓는 순간들이 있었다. 사도마조히즘은 복종을 연기하지만, 그 연기는 지배가 기대고 있던 구조를 흔들어 놓는다. 그것은 폭력을 재현하는 장면이라기보다 폭력이 의존하고 있던 균형을 뒤집는 조용한 실험처럼 느껴졌다.

묶인 몸은 때때로 더 크게 발화한다. 말하지 않아도 신체가 의미를 다시 만든다. 종교의 희생 제의가 공동체의 불안을 하나의 몸에 집중시켜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면, 내가 경험한 사도마조히즘의 장면들은 그 질서를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고통은 더 이상 신성화되지 않고, 희생은 더 이상 누구의 평화를 위해 소비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을 느끼는 신체가 권력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자리로 변한다.

작업 속에서 이 감각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시기가 Dear Fear (2020) 즈음이었다. 그 무렵 나는 듀킴이라는 이름으로는 꺼내기 어려웠던 급진적인 이미지와 감정들을 허니듀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다뤘다. 그 이름은 나를 숨겨주는 다른 표면이었고, 동시에 더 깊은 감각으로 내려가는 입구이기도 했다.

Dear Fear에서 나는 공포와 쾌락, 지배와 복종이 얽힌 여러 장면을 다시 꺼내 보았다. 트렁크에 실린 채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밤, 감시 카메라 아래에서 익명의 시선에 노출된 시간, 십자가에 매달린 채 호흡만 남아 있던 시간—이 장면들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무너지고 다시 조립되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실험실이었다.

이 과정을 지나며 제물의 신체는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게 되었다. 제물은 약한 몸이라기보다 무너지는 질서를 가장 먼저 감각하는 신체에 가까웠다. 어떤 진실은 중심이 아니라 파열의 자리에서만 드러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진실은 말보다 몸을 통해 더 정확하게 전해졌다.

나는 제물의 자리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러나 여러 형태의 되기—샤먼 되기, 아이돌 되기, 제물 되기—를 지나며 그 두려움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이 되기들은 결론을 말하려는 방식이 아니라 규범이 감춰 두었던 틈을 벌리고, 그 틈에서 드러나는 균열의 감각을 몸으로 기록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 틈에서 새어 나오는 미세한 진동이은 오래전부터 나에게 가장 익숙한 언어였다.







성전
     — I Surrender
종교적 신체를 떠올리면, 처음에는 단단히 닫혀 있는 공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신체는 늘 조금씩 열려 있고, 틈을 흘리고 있었다. 종교적 의례는 고통을 연출하면서 그 고통을 구원의 언어로 묶어두려 하지만, 그 봉합은 언제나 완벽하지 않았다. 제물의 몸이 공동체의 불안을 받아내는 동시에 그 불안을 다시 되돌려주던 장면들이, 내게 종교적 신체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 신체의 흔들림을 더 가까이에서 확인하게 된 것은 사도마조히즘의 경험을 통해서였다. 묶인 몸은 복종하는 대상처럼 보이지만, 그 자리에서 감각의 방향이 바뀌고, 고통은 규율을 강화하기보다 규율의 빈틈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신성한 언어보다 먼저 몸이 진동하며 말했고,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감각의 표면을 따라 미묘하게 흩어졌다. 종교적 희생 의례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고통을 중심에 세워 질서를 유지하려 하지만, 고통의 표면에서는 언제나 다른 의미가 흘러나왔다. 질서가 단단해 보일수록, 그 구조를 떠받치는 몸은 더 흔들리고 있었다.

이 흔들림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전’이라는 개념에 닿게 되었다. 기독교는 예수의 몸을 성전이라 말하지만, 그 몸은 찢기고 상처가 열리고, 그 틈을 통해 무언가를 흘려보내도록 요구받았다. 닫힌 공간이라기보다 억지로 열린 성전. 그 열린 자리가 신성의 내부인지, 폭력의 흔적인지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공간이 오래 머물러 있었다.

I Surrender (2023)는 이러한 열린 성전의 이미지에서 출발한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신체가 어떻게 열리고 확장되는지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됐다. SM플레이 중 하나인 피스팅 플레이로 확장된 몸은 단순한 성적 은유가 아니었다. 성전이자 신체가 열린 구조로 변하는 장면이었다. 고통과 쾌락이 섞이며 경계가 흐려지는 이 순간은, 종교적 신체의 오래된 균열과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성전은 닫혀 있는 공간이 아니라, 흔들리고 벌어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표면에 가까웠다. 그 표면에서 신성은 영원한 질서가 아니라 감각의 틈과 파열의 흔적, 재배치되는 권력으로만 존재했다.

그 이미지를 따라가며 나는 작업 속에서 또 하나의 성전을 만들고 있었다. 조용히 열리는 틈, 스스로를 내어주는 몸, 그러나 그 내어줌이 복종이 아니라 질서를 풀어헤치는 힘으로 변하는 순간들. 종교적 신체와 마조히즘적 신체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신체 모두 ‘항복’이라는 단어의 이중성을 품고 있었다. 항복은 제단에서 요구되는 행위였고, BDSM에서 장면을 전복시키는 계기였으며, 몸을 더 넓고 다층적인 공간으로 열어젖히는 시작점이기도 했다.

I Surrender는 그 경계에서 탄생한 작업이었다. 감각이 흔들리면 신성의 경계도 흔들리고, 몸이 열리면 성전의 개념도 따라 열렸다. 고통은 파괴의 흔적만을 남기지 않고 변형의 길이 되었고, 쾌락은 규범이 숨겨왔던 균열을 밝히는 하나의 언어가 되었다. 성전은 결국 닫힌 건물이 아니라, 틈에서 드러나는 신체적 사건에 가까웠다.

나는 그 틈에서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 자리는 신성이 무너지고 다시 조합되며, 권력이 흐르고 얽히고 흩어지는 장소였다. 그 순간 몸은 제물로만 존재하지 않고, 또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I Surrender는 그 세계의 문턱에 잠시 머물러 있던 장면이었다.







군중
     — Enrapture
군중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감정이 한곳으로 쏠렸다가 다시 흩어져 나가는 흐름이다. 군중은 언제나 스스로보다 먼저 흔들릴 몸을 찾고, 그 몸 위에서 자신이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확인한다. 제단의 제물, 무대의 아이돌, 화면 속 얼굴은 모두 그 흐름이 잠시 머무는 표면이었다. 사랑과 지지, 헌신이라는 말이 앞에 있어도,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감정의 구조였다.

팬덤 문화와 종교가 닮아 보였던 것도 바로 이 지점 때문이었다. 사찰에서 기도를 올리는 몸들은 제각각이지만, 향과 빛, 합장의 리듬이 그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놓는다. K-pop 팬덤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었다. 안무는 새로운 기도문처럼 따라 하고, 직캠과 커버 영상은 일종의 세속적 포교 활동처럼 퍼져 나간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찰이 아닌 무대와 카메라, 알고리즘의 공간에 자신의 소망을 걸어두고 있었다.

As If… (2022)는 이 구조를 비유가 아닌 공간으로 옮겨보고 싶어 시작한 작업이었다. 사찰의 마당과 무대의 표면을 겹쳐 보면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욕망을 ‘누군가의 얼굴’에 맡기는지 관찰했다. 스마트폰 화면은 단순한 기록 장치가 아니라 군중의 바람이 잠시 앉아 쉬는 제단처럼 보였다. 얼굴은 계속 교체되고, 신체는 무한히 복제되지만, 군중이 원하는 형식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대신 흔들려 줄 몸, 대신 웃어 줄 얼굴, 대신 무너져 줄 자리.

Enrapture (2022)에서는 이 구조가 극도로 압축된 순간, 이른바 ‘엔딩’에 주목했다. 숨이 가쁜 얼굴, 젖은 피부, 그리고 잠깐 멈춘 표정. 군중은 그 짧은 장면을 하나의 절정으로 기억하고 그 안에 자신의 감정을 쏟아 넣는다. 이 얼굴은 한 개인의 표정이 아니라 군중이 자신을 비추기 위한 표면이 된다. 오랫동안 종교화가 고통과 황홀, 죽음과 구원을 한 얼굴에 겹쳐 담아냈던 방식과 비슷했다.

그래서 나는 그 얼굴이 단순한 이미지로 흘러가게 두고 싶지 않았다. 렌티큘러와 빛, 프레임의 번짐으로 붙들려고 했던 것은 특정한 표정이 아니라 군중이 그 표정에 부여하는 과잉의 의미였다. 종교적 도상이 신성만을 말하지 않듯, 아이돌의 얼굴도 사랑과 집착, 소유욕과 불안이 뒤엉킨 하나의 구조였다.

작품 앞에 선 관객의 얼굴이 화면 속으로 되비칠 때, 군중의 구조는 다시 한 번 뒤집혔다. 욕망이 향하던 얼굴이 자신의 얼굴과 겹쳐지며, 사람들이 잠깐 멈칫하는 장면. 자신이 주체인지 객체인지, 군중인지 우상인지 모호해지는 자리. 팬덤의 구조는 결국 이 반사 속에서 완성되었다. 욕망은 언제나 누군가를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군중의 욕망은 한 몸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면서 자기 감정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사랑을 닮은 잔혹함이 나타나고, 지지처럼 보이는 소유욕이 생기고, 우상화와 소멸이 짧은 시간 안에 반복된다. 군중은 특정한 몸 위에서만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 몸은 결국 군중이 스스로 만들어낸 결핍의 집합이었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흔들리고 있는 것이 무대의 몸이 아니라 군중 자신이라는 사실이 조용히 드러난다.





응시
     
— The Last Scene
무대는 언제나 다른 세계의 입구처럼 느껴진다. 조명이 켜지고 한 몸이 전면에 서는 순간, 그 공간은 일상에서 떨어져 나와 제단처럼 작동한다. 공연이 절정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군중의 시선은 한 점으로 응축된다. 마지막 순간, 그 모든 감정의 흐름은 결국 한 얼굴에 도달한다. 이 시대의 특별한 의례가 된 ‘엔딩요정’의 장면이다.

엔딩요정은 단순한 카메라 클로즈업이 아니다. 반복된 안무와 노래로 소모된 신체가 가장 인간적인 흔적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정돈되지 않은 숨, 땀의 잔열, 떨리는 근육. 그러나 얼굴만큼은 평온하고 완결된 이미지를 요구받는다. 이 충돌은 설명할 수 없는 매혹을 만든다. 해탈과 소진, 숭고함과 육체성이 한 표면에서 접속하는 장면. 그것은 종교적 성화가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기법이기도 했다. 소진과 평온, 육체성과 초월이 한 표면에서 겹치는 장면은 오래된 성화의 얼굴들과도 닮아 있다. 군중은 이 얼굴을 통해 공연의 열기를 마무리하고, 벗어나 있던 감정을 다시 자리로 돌려놓는다.

이 복합적인 얼굴의 작동 방식은
The Last Scene (2023)을 준비할 때 더 뚜렷해졌다. 절정의 신체는 완성된 이미지로 소비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부서지고 있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군중은 그 모순에 열광했고, 나는 그 열광이 어디서 어디에서 오는지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아이돌의 얼굴은 그 순간 하나의 개인을 넘어, 군중 전체의 감정이 잠시 머무는 표면이 된다. 얼굴이 흔들릴 때 마음의 균열이 먼저 드러나는 쪽은 결국 관객 자신이었다.

이 구조는 The Enchanting Offering (2024)에서 공간 전체로 확장되었다. 성당 내부의 조용한 공기와 아이돌의 절정 이미지가 서로를 비추며 기이한 공명을 만들었다. 성스러운 공간은 몸의 표면을 다시 성화했지만, 동시에 그 표면이 얼마나 쉽게 소비와 환호의 대상으로 바뀌는지도 드러났다. 신성함과 욕망, 숭고함과 소비가 서로를 비추는 장면 속에서 몸은 특정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군중의 감정이 통과하는 통로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무대 위의 몸이 어떤 명확한 메시지를 말하는 건 아니다. 말보다 먼저 드러나는 것은 정리되지 않은 표정, 황홀과 소진의 경계, 잠깐 멈칫하는 호흡 같은 것들이다. 관객은 그런 미세한 징후를 읽으며 자신이 잃어버렸던 감정의 스펙트럼을 잠시 되찾는다. 절정의 표정은 군중이 바라는 완벽한 이미지이지만, 그 완성됨이 지속되는 시간은 단 한 프레임뿐이다.

어쩌면 군중이 원하는 것은 그 짧은 순간의 균열인지도 모른다. 균열 속에서 욕망과 결핍이 모습을 드러내고, 사람들은 그 틈에 자신을 비춘다. 무대 위의 신체는 결국 한 개인이 아니라 군중의 정서가 잠시 모여드는 거울이 된다. 절정의 순간이 반복해서 호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잠시 자신을 잊기 위해 다른 얼굴을 찾는다. 무대가 끝나면 그 얼굴에서 빠져나오고, 곧 다른 절정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무대 위의 신체는 제단의 중심이라기보다 제단을 이루는 표면에 가깝다. 군중의 욕망이 가장 먼저 모이고, 군중의 불안이 가장 먼저 드러나는 자리. 엔딩요정은 한 신체의 이미지라기보다 군중의 감정 구조가 마지막으로 흔들리는 파문이다. 그 파문이 잦아들면 사람들은 다시 흩어지고, 다음 절정을 찾아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마 그 기다림 자체가 이 시대의 의례인지도 모른다.
무대는 그 의례가 반복해서 태어나는 가장 작은 세계이다.







붕괴
     
— After the Applause
무대는 절정을 향해 올라가지만, 공연이 끝난 뒤의 풍경은 전혀 다른 감각을 남긴다. 조명이 꺼지고 환호가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는 욕망과 긴장이 지나갔던 흔적만 남는다. 누가 서 있었는지보다, 그 자리를 둘러싼 구조가 어떻게 움직였는지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무대의 끝은 언제나 신체의 끝과 이어져 있다.

After the Applause (2025)는 바로 그 장면을 다뤄보고자 했던 작업이다. 절정이 사라진 뒤 남은 것은 완결된 이미지가 아니라 조금씩 무너진 표면들이다. 꺽인 마이크는 목소리를 잃은 몸처럼 보이고, 빛을 잃은 응원봉은 욕망의 온기가 식어가는 장면처럼 느껴진다. 도구들은 제 역할을 다했지만, 그 도구들을 움직이던 힘의 잔향은 여전히 공기 속에 남아 있다.

이 장면은 단순히 공연의 여운이 아니다. 무대 위의 신체는 늘 찬양과 소진의 사이에서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오래된 제의의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숭배가 깊어질수록 희생이 더 가까워진다는 사실, 이 잔혹한 순환은 오래전 종교와 오늘의 대중문화가 묘하게 같은 형식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빛을 받는 몸은 가장 먼저 닳아 사라지는 자리이고, 군중은 그 소진을 통해 또 다른 욕망을 확인하곤 한다.

무대 아래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소리의 파편들은 환호인지 비명인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축제가 끝난 뒤에도 남아 있는 군중의 잔향은 기쁨과 슬픔, 열광과 조롱이 얽힌 여러 층위를 만들고 있고, 그 층위가 보이지 않는 제단의 골격을 구성한다. 군중은 하나의 집단으로 보이지만 사실 서로 다른 감정들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지층이다. 그 지층이 흔들릴 때 무대의 표면도 함께 무너진다.

절정의 순간에 무대위의 몸은 숭배의 대상처럼 보이지만, 절정이 지나고 나면 그 숭배를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의 붕괴가 필요해진다. After the Applause에 남은 잔해들은 이런 구조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목소리를 지탱하던 마이크는 바닥에 누워 있고, 응원봉은 침묵을 남긴 채 빛을 잃는다. 이것은 단순한 폐허라기보다, 군중의 감정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방식을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다.

절정은 결코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절정은 군중이 순간적으로 만들어낸 사건이며, 그 순간을 위해 누군가의 신체가 제물처럼 호출된다. 제물은 신성의 증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폭력의 구조가 가장 먼저 드러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무대 위의 몸은 스스로 선택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군중의 감정 구조가 그 자리를 끌어당긴 것이다. After the Applause는 그 구조가 남긴 잔여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잔여가 다시 새로운 욕망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무대는 끝났지만 군중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흩어지는 순간에도 서로의 결핍을 비춰보고, 다음 절정을 향해 다시 움직인다. 무대가 무너진 장면은 끝처럼 보이지만, 군중이 새로운 얼굴을 찾는 순간 다음 의례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제단은 반복해서 다시 세워지고, 신체는 또다시 중심으로 불려온다. 절정의 잔해는 종말이 아니라 반복의 신호다.

After the Applause가 남기는 것은 결국 한 가지다. 무대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지만, 군중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는 것. 군중이 끝나지 않는 한, 제단은 계속해서 다시 세워지고 또 다른 몸이 그곳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무대가 무너진 자리에서도 군중은 이미 다음 장면을 기다리고 있다. 다시 흔들릴 얼굴을 찾기 위해, 다시 자신을 비출 표면을 만들기 위해.

이 불안정한 기다림이야말로 무대의 마지막 장면이며, 동시에 다음 장면의 시작이다.







떨림무대는 끝나지만 장면은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 어떤 신체가 제물의 자리를 통과하고, 어떤 규범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군중이 감정의 다음 위치를 찾아 다시 흩어지는 일은 계속 반복된다. 무대 위의 흔적들은 이미 파편처럼 흩어졌지만, 그 파편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새로운 욕망의 구조가 다시 조용히 자라난다. 나는 그 순환을 멈추려 한 것이 아니라, 그 순환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는지 조금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싶었다. 무너진 제단의 뒤편에서야 비로소 세계의 문법이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대가 정리된 뒤에도 진동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소리가 사라진 공간보다 한동안 떨리던 신체의 미세한 흔들림이 더 오래 남는다. 그 흔들림에서 다시 어떤 세계가 시작될 것이라는 감각만이 조용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