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떠난 무대
신체와 의례, 폐허의 감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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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프롤로그
     : 부서진 별








조명은 별처럼 쏟아져 내려 내 몸을 물들이고, 마이크는 손끝에서 떨리며 작은 심장처럼 울린다.
함성은 파도처럼 몰려와 내 몸을 들어 올리고, 나는 무대의 중심으로 세워진다.
이 순간 내 존재는 흔들리고, 그 대신 무대는 완전해진다. 나는 위태롭고, 환호는 나를 삼키며, 세상은 완전해진다.
Shattered Stage. Shattered Star.

끝없는 빛들이 몰려와 나를 삼키고, 망설임 없는 환호 속에 홀로 선 나는 무대 위에서 불타오른다.
빛의 홍수는 나를 축복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제물로 올려놓는다.
환희와 희생은 결국 하나의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
노래와 비명, 무대와 제단은 구분되지 않고, 모두 한 줄기 강물처럼 흘러간다. 나는 흘러넘친다.
빛과 소리는 부서지고, 환호는 무게가 된다. 마이크는 내 구멍 깊은 곳을 찔러 관통한다.
Shattered Stage. Shattered Star.

그러나 역설은 뒤집힌다.
이 순간 내 존재는 완전해지고 대신 무대는 흔들린다. 나는 영원해지고 세상을 삼키며, 역설 속에 군림한다.
이 무대 위에서 내가 영원할 수 있다면, 나는 여기에서 무릎을 꿇어도 상관없다.
내 얼굴을 바닥에 던져 벌거벗은 채로. 널 위해 더 높이 허리를 꺾어 올리겠다.
그리고 다시, 끝없는 빛들이 몰려와 나를 삼키고, 마이크는 내 구멍 깊은 곳을 찔러 관통한다.
Shattered Stage. Shattered Star.


나는 오래전부터 ‘무대’라는 장면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곳은 단순히 공연이 펼쳐지는 공간이 아니라 사회가 자기 모습을 반복해 보여주는 하나의 제의처럼 느껴졌다. 무대에는 욕망과 통제, 환희와 폭력이 늘 뒤섞여 흐르고, 그 위에 서 있는 몸은 세상의 불안을 대신 받아내는 표면이 된다. 나는 그 몸이 사회의 감정과 권력을 어떻게 흡수하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감각의 질서가 어떻게 다시 쓰이는지 오래 바라보아 왔다.

나에게 몸은 하나의 언어다. 신념과 죄책, 쾌락과 모순이 겹겹이 새겨진 살아 있는 책이며 사회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불러내는 텍스트다. 몸은 늘 새롭게 쓰인다. 숭배와 파괴가 맞부딪히는 장면 속에서 군중의 욕망과 두려움이 동시에 새겨지는 표면이 된다. 나는 그 ‘다시 쓰이는 몸’을 통해 세계의 구조를 읽는다.

오늘의 사회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신의 형식은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높이 올려놓고 다시 무너뜨린다. 구원 대신 희생을 반복하고 신앙 대신 열광을 되풀이한다. 무대 위의 몸은 이 모순의 상징이다. 사랑받기 위해 부서지고 찬양받기 위해 희생된다. 환호는 헌신과 처벌이 동시에 섞인 언어처럼 작동하고 군중은 그 구조를 즐기면서도 외면한다. 나는 그 장면 속에서 지금 시대가 가진 또 다른 제의를 본다. 종교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 남아 있는 세속화된 신앙의 형식이다.

이때 퀴어의 신체는 그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퀴어의 몸은 언제나 경계에서 태어나고 그 경계 안에서는 사회의 욕망과 금기가 가장 날것으로 부딪힌다. 그러나 퀴어의 신체는 단순히 억압된 존재가 아니다. 금지된 감각의 언어로 세계를 다시 번역하는 존재다. 규범의 그림자를 비추고, 권력의 방향을 뒤틀며, 보이지 않았던 폭력의 결을 드러낸다. 퀴어의 몸은 희생의 상징이 아니라, 세계의 균열을 감지하는 섬세한 기관이다.

나는 무대와 몸을 통해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믿음을 반복하는지 본다. 구원이 사라진 시대에도 사람들은 제의를 멈추지 않는다. 그 제의는 더 이상 종교적이지 않지만, 대중문화와 정치, 팬덤과 미디어 속에서 다른 형식으로 되살아난다. 사람들은 신을 부정하면서도 누군가를 제물로 삼길 원한다. 무대는 그 욕망이 모여드는 장소이고 예술은 그 의례를 드러내는 언어다.

예술은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은 언제나 ‘부서짐’의 순간을 기록한다. 그 순간 몸은 다시 쓰이고 의미는 다시 조립된다. 나는 그 재구성의 장면 속에서 새로운 감각의 문법을 본다. 그것은 믿음의 문법이 아니라 감각의 질서이며, 구원의 약속이 아니라 드러냄의 용기다.

Shattered Stage. Shattered Star.
모든 무대는 결국 부서지고, 그 잔해 위에서 새로운 언어가 태어난다.







Ⅱ. 피의 무대
    : 제물의 미학

무대는 언제나 빛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아래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는 피의 흐름이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환호를 보내지만 그 소리 깊숙한 곳에는 오랜 제의의 울림이 숨어 있다. 신에게 피를 바치는 시대는 끝났지만 사회는 여전히 누군가가 무릎을 꿇는 순간을 통해 자신이 어떤 질서를 원하는지 조용히 확인한다. 희생은 단지 옛말이 아니다. 다만 눈에 띄지 않게, 더 섬세하고 감정적인 얼굴로 모습을 바꿨을 뿐이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불려 나온 몸들은 이상할 만큼 비슷한 방식으로 흔들리고, 또 비슷한 방식으로 소비된다. 그러한 장면을 바라보는 짧은 순간 동안 사람들은 잠시나마 스스로의 불안을 잊는다. 무대 너머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결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형태가 아무리 바뀌어도 구조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폭력은 사라지는 법이 없다. 단지 옮겨 다닐 뿐이다. 그렇게 희생은 말없이, 그러나 단단하게 사회의 진동을 조율해 왔다.



2.1. 제물의 언어 — 폭력의 형식과 사회적 안정의 기술

희생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얼굴이 바뀌었을 뿐이다. 제단은 더 이상 성당 안에 놓여 있지 않다. 대신 무대의 조명 아래에서, 정치 연설의 포디엄 위에서, 팬덤의 라이브 스트리밍 창 속에서 조용히 작동한다. 오늘의 사회는 매일 새로운 제물을 불러내고, 찬양하고, 소비하고, 다시 호출한다. 피는 흐르지 않지만 감정은 순환하고, 고통은 금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화의 언어가 된다.

사회는 폭력과 질서 사이에서 묘한 균형을 찾으려 한다. 르네 지라르는 인간이 폭력을 제거하는 대신 하나의 몸에 집중시키며 조절한다고 말했다.1 그 말은 오래된 이론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지금 사회가 움직이는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정치의 말투, 언론의 프레임, 무대의 구조는 서로 다른 장면처럼 보이지만 놀라울 만큼 비슷한 방식으로 이 원리를 되풀이한다. 사회는 누군가의 고통을 ‘공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안정에 도달하고, 그 고통이 충분히 보일 때 군중은 잠시나마 자기 정당화를 얻는다.

그러나 그 정당화는 진심이라기보다 사회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얇은 껍질과 가깝다. 메리 더글러스가 말했듯, ‘부정한 존재’2는 원래부터 더러운 것이 아니라, 경계를 흔드는 몸에 붙는 이름이다. 사회는 그 이름을 필요로 하고, 사람들은 그 몸을 통해 자신이 아직 ‘안쪽’에 있다는 감각을 확인한다. 빛은 축복처럼 보이지만 통제의 장치이고, 환호는 응원처럼 들리지만 결국 “더 보여달라”는 은밀한 명령이다. 무대 위의 신체는 사랑받는 동시에 감시되고, 찬양받는 동시에 벌어진다.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자기모순을 봉합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공적 장치가 된다.

나는 무대가 끝난 뒤의 침묵에서 이 구조를 본다. 조명이 꺼지고 환호가 사라진 뒤에도 공간에는 소모의 흔적이 길게 남는다. 이 ‘소모’는 효율을 숭상하는 사회에서는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되지만, 오히려 그 쓸모없음이 예술적, 사회적 장면을 성립시키는 핵심이 된다. 문명은 이 무익한 순간 속에서 자신을 조율하고, 사회는 겉으로는 낭비를 비난하면서도 은밀히 그것을 갈망한다. 스타의 번아웃, 정치인의 단식, 수행자의 피로는 서로 다른 장면 같아 보이지만 결국 모두 감정의 질서를 유지는 방식으로 재가공된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바타유의 말이 떠오른다. 희생은 “소모될 수밖에 없는 에너지의 낭비”3로 설명했는데, 지금 시대의 장면들 위에서 그 말은 더욱 명확해진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법과 생명 사이에 버려진 존재”4를 말했지만, 오늘의 사회는 이 존재를 더 이상 변두리에 방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먼저 호출한다. 뉴스의 헤드라인, 팬덤의 타임라인, 정치의 생중계 같은 서로 다른 장면들은 제물을 배열하는 방식에서 놀라울 만큼 비슷한 구조를 보인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특별한 능력이나 역할이 아니라, 대신 고통을 견뎌 줄 몸, 대신 무너져 줄 얼굴, 대신 책임을 감당해 줄 신체다.

이 신체가 겪는 고통은 어떤 이상을 증명하기보다 감정의 장식처럼 소비되고, 사회는 그 장식을 통해 스스로의 정당화 구조를 조용히 정렬한다. 희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많은 시선이 모이는 자리에서 작동한다. 그래서 아감벤이 말한 ‘버려진 자’는 역설적으로 오늘날 가장 자주 소환되는 존재가 된다. 현대의 제물은 제거된 존재가 아니라, 감정을 순환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되는 중심 장치에 가깝다.

결국 희생은 감정의 통제 시스템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자기 감정의 온도를 조절한다. 슬픔을 소비하며 안정되고, 분노를 배출하며, 균형을 얻는다. 고통은 어떤 윤리적 진실이 아니라 사회가 자기 보존을 위해 가동시키는 구조다. 그리고 그 구조는 점점 더 빠르게, 더 세밀하게, 더 매끄럽게 작동한다. 오늘의 사회는 희생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더 자주, 더 즉각적으로, 더 아름다운 표면을 입혀서.

이 시대의 제단은 피로 물들지 않는다. 대신 빛과 사운드, 이미지와 감정으로 구성된다. 제물은 죽지 않는다. 살아 있는 채로 소비되고, 다시 포장되어 또 호출된다. 희생은 사라진 적이 없다. 다만 훨씬 더 세련된 언어로, 더 부드럽고 매끄러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되돌아왔을 뿐이다.



1 René Girard, Violence and the Sacred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7).
2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An Analysis of Concepts of Pollution and Taboo (New York: Routledge, 1966).
3 Georges Bataille, The Accursed Share: An Essay on General Economy, Vol. 1 (New York: Zone Books, 1988).
4 Giorgio Agamben,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2.2. 불안의 정치 — 군중의 욕망과 희생의 재현

근대는 스스로 희생을 버렸다고 믿었지만, 그 믿음은 오래전에 무너졌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근대가 남긴 희생의 장치를 은밀히 이어받았고, 더 빠르고 더 넓게, 더 감정적인 방식으로 확장시켰다. 디디에 파생이 말한 “정당한 희생자를 끊임없이 재발명하려는 욕망”5이라는 문장은 원래 역사적 진단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지금의 풍경을 떠올리면 거의 현실의 묘사처럼 들린다. 종교적 희생이 사라진 자리는 결코 비어 있지 않았고, 그 틈을 채운 것은 디지털 정동경제와 정치적 동원, 팬덤의 감정 연산이 서로 맞물려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의례였다. 희생은 과거에 남겨진 흔적이 아니라, 오늘의 세계가 가장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에 더 가깝다.

근대는 스스로 희생을 버렸다고 믿었지만, 그 믿음은 오래전에 무너졌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근대가 남긴 희생의 장치를 은밀히 계승했고, 더 빠르고 더 넓게, 더 감정적으로 작동시키는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디디에 파생이 말한 “정당한 희생자를 끊임없이 재발명하려는 욕망”5은 이제 역사적 성찰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가리키는 문장처럼 들린다. 종교적 희생이 사라진 자리는 텅 비지 않았다. 그 공간을 채운 것은 디지털 정동경제, 정치적 동원, 팬덤의 감정 연산이 서로 얽혀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제의다. 희생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동시대를 움직이는 가장 안정적인 원리다.

불안정한 시대일수록 군중은 더욱 필사적으로 ‘희생의 장면’을 찾는다. 지젝의 말처럼, “우리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지만, 신 없는 세계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더 큰 환상을 만든다.”6는 문장은 지금 우리의 풍경을 거의 그대로 비춘다. 초월적 구원을 믿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구원의 형식을 필요로 한다. 정치도, 미디어도, 팬덤도 이런 공백 위에서 움직인다. 군중이 원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라기보다 감정을 걸어둘 하나의 표면이며, 그 표면은 언제나 어떤 신체의 형태로 나타난다. 불안은 빈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 빈자리가 채워지는 순간 희생의 구조는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정치의 장면은 이 새로운 희생의 문법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단식, 순교 프레임, 응징과 구원의 서사는 이념과 진영을 가리지 않고 반복된다. 나는 정치가 더 이상 설득이나 비전의 경쟁이 아니라, 누가 ‘희생의 자리를 점유하느냐’에 따라 감정적 권위가 결정되는 제의적 무대가 되었음을 본다. 도널드 트럼프, 자이르 보우소나루, 윤석열, 조르자 멜로니 같은 인물들은 능력이나 정책보다, 군중의 분노, 피로, 혐오를 대신 견디는 ‘대리 신체’로 호출된다. 이들은 초월적 지도자가 아니라 대리 고통의 기호다. 동시대 정치에서 권위를 결정하는 것은 논리나 정책이 아니라 ‘얼마나 가시적인 상처를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정동적 지표다. 이는 근대적 합리성의 해체이며, 동시에 희생의 귀환이다.

대중문화도 이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K-pop 그룹 BTS의 리더 RM이 “나는 사람인데, BTS는 더 이상 인간에게 가능한 감정의 양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 와 있다”7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문장을 단순한 번아웃의 고백으로 듣지 않았다. 그것은 동시대의 스타가 군중의 불안, 기대, 즉각적 정서의 속도를 대신 견디는 ‘감정적 제물’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드러낸 장면이었다. 팬덤은 스타의 고통을 공감한다고 말하지만 그 고통을 곧바로 헌신, 성장, 영웅의 서사로 변환해 더 강한 결속을 만든다. 나는 이 변환을 볼 때마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높은 가치로 거래되며 서사적 장식이 된다는 사실을 목격한다. 스타의 아픔은 비극이 아니라 콘텐츠가 되고 부담이 아니라 정체성을 강화하는 자원이 된다.

이 구조는 디지털 환경에서 가장 급격하게 가속된다. 공연 중 다친 스타에게 “계속해!”라고 외치는 정동의 속도, 아픈 아이돌의 병원 침상을 영웅 서사의 상징처럼 소비하는 SNS의 프레이밍, 심지어 연예인의 죽음조차 팬덤의 ‘감정적 연대’의 증거로 재포장되는 장면들은 희생의 구조가 얼마나 효율적이고 매끄럽게 가공되는지를 보여준다. 디지털 정동은 빠르고 정확하며 잔혹하다. 희생의 대상은 실시간으로 선택되고, 실시간으로 소비되며, 실시간으로 폐기된다. 이 장면들 속에서 나는 희생이 더 이상 종교나 정치적 이벤트가 아니라 실시간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감정 순환 장치가 되었다는 사실을 본다.

SNS는 이 희생 구조를 거의 의례적 형식으로 반복한다. 사과문 요구, 해명 영상 요구, 해시태그를 통한 표적화는 이제 일종의 ‘디지털 처형 의례’가 되었다. 군중은 분노를 배치할 대상을 실시간으로 줄세우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감정적 질서를 재정렬한다. 디디에 파생이 말한 “희생의 윤리화”8는 원래 특정 희생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 공동체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기제를 가리키지만, 오늘의 장면에서는 그것이 윤리가 아니라 정동을 소비하기 위한 기술처럼 작동한다. 희생은 더 이상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불안을 관리하기 위해 감정 자본주의가 반복해서 호출하는 최소 단위의 알고리즘이 된다.

결국, 근대가 폐기했다고 주장했던 희생의 구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동시대의 정동경제, 즉 정치·팬덤·SNS·문화산업이 서로를 가속시키는 체제 안에서 더욱 집요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되살아났다. 나는 이 세계를 관찰할 때마다 희생이 과거의 신화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가장 세련된 통치 구조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 군중은 고통을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통을 재배치한다. 그리고 그 재배치의 순간마다 세계는 잠시 안정을 얻는다. 희생은 끝난 적이 없다. 단지 속도가 달라졌고, 대상이 달라졌고, 매체가 달라졌을 뿐이다. 희생은 근대가 버린 유물이 아니라 동시대가 가장 빠르게 소비하는 감정의 형태다.



5 Didier Fassin, Humanitarian Reason: A Moral History of the Present, trans. Rachel Gomm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2).
6 Slavoj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 (Cambridge, MA: MIT Press, 2003).
7 RM (Kim Namjoon), remarks in BTS 2022 Festa dinner conversation video, HYBE LABELS Official YouTube channel, June 2022.
8 Didier Fassin, Humanitarian Reason: A Moral History of the Present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1).


2.3. 무대는 제단이다 — 세속적 의례의 정치신학

나는 무대를 바라볼 때마다 그것이 단순한 공연의 장소가 아니라, 사회가 스스로를 다시 연출하는 가장 노골적인 의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대는 하나의 제단이고, 빛과 소리와 몸은 그 제단을 움직이게 하는 장치들이다. 조명은 축복처럼 쏟아지지만 동시에 심판의 광선이고, 사운드는 환희를 말하면서도 명령을 흘려보낸다. 마이크는 말을 가능하게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속박의 철사처럼 입술과 몸을 조인다. 스타의 신체는 사제이자 제물이자 우상이 한 자리에서 겹쳐지는 기묘한 위치로 밀려난다. 무대는 종교의 대체물이 아니라, 종교의 형식을 더 세속적으로 이어 붙여 만든 장치다.

의례는 언제나 특정한 신체를 중심으로 감정과 권력을 다시 배열한다. 오랜된 종교의 제의가 그랬고, 축제가 그랬고, 집회와 경기와 공연이 모두 그랬다. 나는 이 장면들 속에서 늘 비슷한 흐름을 본다. 반복되는 노래, 일정한 리듬, 집단적 움직임, 색과 빛의 조율, 그리고 온몸을 흔드는 진동. 규범은 잠시 옆으로 밀려나고, 개인의 경계는 흐릿해지며, 감정은 더 큰 흐름 속으로 합류한다. 터너가 말한 ‘리미널리티’, 즉 경계가 흐려지고 전환의 감각이 생겨나는 그 상태는 더 이상 종교적 제의에만 속하지 않는다.8 오늘 날 군중이 모이는 거의 모든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되살아난다.

이곳에는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고유한 기운이 있다. 그 기운은 숭고함이나 원형을 향한 경외가 아니라, 노출과 위험과 헌신의 순간에 신체가 발산하는 에너지에 가깝다. 나는 이 에너지가 동시대 사회에서 일종의 감각적 권위처럼 작동하는 것을 본다. 군중은 이 기운을 통해 감정을 묶어내고 불안과 기대와 분노를 동시에 한 방향으로 모은다.

무대가 제단으로 작동할 때, 그 중심에 선 몸은 개인이 아니다. 그들은 집단의 감정이 임시로 모여드는 표면이며, 스스로의 의지를 넘어서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 스타는 사제처럼 말하고, 제물처럼 소모되며, 우상처럼 숭배된다. 이 세 자리는 서로 멀어지는 대신 하나의 몸 안에서 포개지고, 군중은 그 몸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기준을 확인한다. 소모는 실패가 아니라 의식이고, 피로는 결함이 아니라 봉헌의 흔적이다. 나는 이 장면 속에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9가 단순히 억압의 상징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정동 구조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 의례적 구조에서 가장 절정의 순간은 늘 마지막 장면이다. 종교적 제의에서도 제물의 최후의 표식은 공동체의 감정을 하나로 묶는 순간이었고, 현대의 무대 역시 이 형식을 거의 그대로 반복한다. K-pop에서 ‘엔딩요정’이라 불리는 장면은 바로 그 세속적 제의의 클라이맥스다. 공연의 끝자락,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채 카메라는 단 한 사람의 얼굴을 고정한다. 땀에 젖은 피부, 미세하게 흔들리는 호흡,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으려 버티는 표정은 숭고함과 소진이 한 점에서 만나는 작은 성화(聖畵)와도 같다.

그 얼굴은 성스럽고 또 어딘가 에로틱하다. 피로와 쾌감, 헌신과 노출이 한 지점에서 겹쳐지며, 스타의 표정은 ‘보호받아야 할 성스러움’과 ‘욕망을 자극하는 표면’을 동시에 품는다. 종교 미술의 성인들이 고통과 황홀 사이에서 빛을 발하듯, 엔딩요정은 자신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장면화하며 하나의 봉헌물로 변한다. 그 순간 스타는 단순한 퍼포머가 아니라 ‘마지막 표면’을 제공하는 제물이 된다. 팬들의 열광은 결국 소진된 신체의 잔여를 숭배하는 행위이며, 인류가 오래도록 예수의 형상을 소비해온 방식, 이를테면 상처와 젊음, 황홀이 겹쳐진 그 이미지와도 자연스럽게 닮아 있다. 엔딩요정은 죽음이 아니라 소진의 절정이며, 그 절정은 다음 무대를 위한 새로운 기원을 복제한다.

그러나 바로 이 절정에서 장면은 미세하게 흔들린다. 숭배의 구조는 언제나 파국의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감정이 과열되는 순간 제단은 불안정한 리듬을 내기 시작한다. 환호가 집단적 몸을 트랜스 상태로 끌어올릴 때, 폭력은 예외가 아니라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결과가 된다. 잠재적 결과가 된다. 역사가 보여주듯, 제의는 숭고함만을 생산하지 않았다. 열광이 죽음으로 이어진 순간들, 축제가 폭력으로 변한 순간들, 환희가 한순간에 붕괴로 치닫는 순간들은 모두 같은 구조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의 공연과 집회, 경기와 퍼포먼스 역시 이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기술이 위험을 가리고 있을 뿐, 구조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긴장감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응원봉이다. 수만 개의 빛이 동시에 점멸하며 하나의 색으로 합쳐질 때, 군중은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몸으로 변한다. 빛은 응답이 되고, 열광은 언약이 되고, 손의 흔들림은 충성의 징표가 된다. 응원봉은 자유의 도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집단적 몸이 스스로를 조율하는 작은 회로다. 이 구조 속에서 스타는 다시 불려 나온다. 그들은 사제이자 제물이며 동시에 신성한 표면으로 등장하고 그 몸의 모든 떨림은 집단적 정서를 유지하기 위한 ‘봉헌된 감정’이 된다.

그리고 늘 마지막에 남는 침묵에서 진실을 볼 수 있다.
빛이 꺼지고,
군중이 흩어지고,
소리가 가라앉은 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변함없이 희생의 잔여물이자 소모된 신체의 흔적뿐이다.

무대의 환희가 지나간 뒤 남는 이 표면에서, 나는 동시대가 감추고 싶어 하는 정치신학적 진실을 본다. 무대는 숭배의 장소이자 파괴의 문턱이며, 희생의 장치를 가장 은밀하게 작동시키는 구조다. 무대는 종교를 지우지 않았다. 다만 그 감정적·의례적·정치적 형식을 오늘의 방식으로 다시 정렬해 놓았을 뿐이다.

나는 무대가 꺼진 뒤 남는 잔향에서 세계의 구조를 읽는다. 폭력과 숭배, 통제와 열광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며 동시대가 가진 가장 강력한 정치신학적 장치를 이룬다.



8 Victor Turner, The Ritual Process: Structure and Anti-Structure (Chicago: Aldine, 1969).
9 Giorgio Agamben,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trans. Daniel Heller-Roaze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Ⅲ. 군중의 장면
    : 결핍의 연출

희생의 자리를 따라가다 보면 그 틈에서 더 거칠고 원초적인 힘이 드러난다. 한 몸의 균열이 드러나는 순간 감정은 개인의 경계를 벗어나 집단 쪽으로 빠르게 흘러가고, 그 흐름은 다른 몸을 향해 빠르게 번져 간다. 군중은 완결된 진실보다 흔들리는 틈에 더 강하게 반응하며, 균열이 발견되는 순간 곧바로 다른 몸을 찾기 시작한다. 감정은 표면과 표면 사이를 이동하며 회로를 유지하고, 그 이동 속에서 욕망과 결핍은 서로를 밀어 올리는 동력이 된다. 군중은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은 다시 흔들릴 수 있는 몸, 다시 소비할 수 있는 틈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또 다른 장면이 조용히 열린다.



3.1. 욕망의 표면 — 군중은 왜 ‘대신 흔들릴 몸’을 찾는가

군중의 욕망은 직접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겉으로는 사랑과 지지를 말하지만, 그 감정의 흐름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타인의 신체를 경유해 다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곡선을 그린다. 군중은 타인을 사랑하기보다 타인을 통해 자신의 감정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한다. 누군가의 눈물, 누군가의 흔들림, 누군가의 무너짐을 보아야만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를 검증할 수 있다. 욕망은 대상에게 곧장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겪는 감정의 굴곡을 거쳐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는 구조를 갖는다.

나는 군중이 타인의 몸을 바라보는 순간마다 비슷한 작동 방식을 본다. 어떤 몸의 균열은 공감의 이유가 되기보다 군중이 아직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실패와 파열은 분노의 대상이라기보다 개인의 윤리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작은 확인이 된다. 스타의 고통, 정치인의 무너짐, ‘피해자’로 불린 누군가의 떨림은 군중이 자기 감정을 비추기 위해 사용하는 거울이 된다. 그들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표면을 한 번 통과한 뒤 다시 군중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욕망은 결국 언제나 반환되는 감정이다.

그리고 이 욕망은 겉으로는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흐름 속에서 작동한다. 르 봉이 말한 군중은 본능과 충동에 휩쓸려 개인성을 잃어버리고, 단순한 감정의 집합체가 되어버린 존재였다. 카네티 역시 군중이 스스로를 ‘팽창시키며’ 감정적 압력을 키워가는 방식에 주목했는데, 이 두 이론 모두 감정이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폭발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늘의 디지털 환경에서 군중은 이런 고전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움직인다. 감정은 돌발적으로 솟아오르기보다는 알고리즘이 마련한 경로 위에서 흐른다. 플랫폼은 어떤 감정이 먼저 노출될지 순서를 정하고, 미디어는 사건의 모양을 특정한 각도에서 고정하며, 팬덤의 규범은 허용 가능한 감정의 범위를 미리 좁혀 둔다. 이러한 장치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명령하지 않지만, 감정이 흘러갈 수 있는 방향을 은밀히 설계한다. 그래서 군중은 감정을 자발적으로 느끼기보다 이미 준비된 자리로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가고, 감정은 개인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장치들이 미리 그려둔 흐름 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렇게 미리 그려진 흐름 속에서는 결국 하나의 신체가 필연적으로 필요해진다. 흔들릴 몸, 감정을 대신 떠안아줄 표면, 집단적 과잉을 흡수할 수 있는 신체. 군중은 이 신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감정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서로에게 반사시키며 집단적 확신을 만들어낸다. 스타의 고통은 공감의 대상이라기보다 ‘우리의 감정이 아직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로 소비되고, 정치인의 상처는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대리 분노’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가 된다. 감정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같은 형태로 반복될 뿐이다.

그래서 군중은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실제로 바라는 것은 흔들릴 수 있는 또 다른 몸, 소비될 수 있는 또 다른 틈이다. 누군가가 대신 무너지는 순간 군중의 감정은 구체적인 형태를 갖고, 그 형태는 곧 다시 군중에게 돌아와 하나의 방향을 만든다. 사랑은 타인에게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군중 자신의 감정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구원도 마찬가지다. 군중은 구원을 말하지만 구원 자체를 믿지는 않는다. 그들이 믿는 것은 구원의 형식을 수행해줄 장면, 즉 어떤 몸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욕망의 중심에는 언제나 결핍이 있다. 결핍이 사라지는 순간 욕망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에 군중은 하나의 신체를 소모하면 곧바로 다른 신체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장면, 새로운 얼굴, 새로운 흔들림. 감정의 흐름이 멈추지 않기 위해 군중은 끊임없이 다음 표면을 호출한다. 욕망은 개인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유지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대리 신체를 찾는 집단적 구조다. 그리고 그 구조는 멈추지 않는다. 결핍이 존재하는 한 군중의 욕망은 언제든지 다음 흔들릴 몸을 부르게 된다.



3.2. 비어 있는 중심 —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군중의 욕망은 언제나 채워지기를 바라면서도 끝까지 채워지는 순간을 두려워한다. 충만은 욕망의 종말이며, 욕망이 멈추는 자리에서 군중이라는 구조는 금세 흩어진다. 그래서 그들이 붙드는 것은 언제나 조금 비어 있는 어떤 것, 도착하지 않은 약속처럼 남아 있는 서사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신체다. 결핍은 군중의 정동을 끌어당기는 중심이고, 이 결핍이 유지되는 동안에만 군중은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 때문에 군중은 구원을 말하면서도 완결된 구원은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구원이 다가오는 듯한 긴장, 어딘가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춰가는 가능성, 즉 도착하지 않는 구원의 그림자다. 라클라우가 말한 것처럼 군중에게 메시아는 실체가 아니라 내용이 비어 있는 기표에 가깝다.10 그 자리는 누구라도 잠시 점유할 수 있고, 다시 비워지기 때문에 욕망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지젝의 “우리는 신을 믿지 않지만 더 큰 환상을 만든다”11는 말 또한 이 구조를 설명한다. 군중이 원하는 것은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지되는 감정의 긴장이다.

군중의 시선은 결국 하나의 신체로 모인다. 그 신체는 구원도, 구원의 실패도, 때로는 몰락의 기미까지 연기해야 한다. 정치적 장면에서는 이 구조가 더욱 선명하다. ‘강한 지도자’라는 말은 능력의 문제라기보다 군중의 분노와 불안을 대신 감당해줄 몸을 지칭한다. 그는 메시아라기보다 메시아적 자리를 임시로 메우는 존재이며, 완전히 무너지지도,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은 불안정한 표면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애매하게 버티는 몸만이 군중의 결핍을 떠받칠 수 있다.

이 신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감정의 회로 속에서 실제로 기능하는 매개체다. 군중은 그 신체를 거쳐 자신의 감정을 확인한다. 누군가의 떨림은 스스로가 아직 버티고 있다는 신호가 되고, 누군가의 붕괴는 자신의 균열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제공한다. 스타의 눈물, 정치인의 단식, 피해자로 호명된 누군가의 흔들림은 모두 군중의 감정을 묶어내는 중심점이 된다. 타인의 몸은 군중이 감당하지 못한 감정의 과잉을 대신 받아내고 되돌려주는 스크린이 된다.

바우드리야르가 말한 “기호의 과잉 속에서 실체는 희미해진다”12는 문장은 이 구조에서 다시 힘을 얻는다. 군중이 기대하는 것은 실체 있는 구원이 아니라 계속 유지되는 긴장이다. 메시지가 아니라 빈자리, 실체가 아니라 형식. 욕망이 계속 움직이기 위해서는 결핍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군중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들이 원하는 것은 메시아가 오지 않는 상태다. 메시아가 도착하는 순간 결핍이 사라지고, 결핍이 사라지는 순간 욕망은 멈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군중이 선택하는 신체는 충분히 흔들릴 수 있어야 하고, 피로와 균열을 표면에 드러낼 수 있어야 하며, 금방이라도 파열될 것 같은 긴장을 품고 있어야 한다. 지나치게 견고한 몸은 결핍을 증명하지 못한다. 취약한 몸, 금세 무너질 것 같은 표면만이 결핍을 유지시키고 욕망의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 군중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감정의 형태를 배우고, 타인의 실패를 통해 자신의 윤리가 남아 있다고 느끼며, 타인의 피로를 통해 공동체의 긴장을 유지한다. 이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이 순환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이 순환은 한 인물에게 오래 머물지 않는다. 어떤 신체의 파열이 충분히 소비되면 곧바로 다른 신체가 호출된다. 플랫폼은 이 전환을 가속한다. 알고리즘은 새로운 파열을 끌어올리고, 검색어는 감정의 방향을 바꾸며, SNS는 군중이 다음에 흔들리길 원하는 표면을 눈앞에 내세운다. 군중은 자신이 선택한다고 믿지만, 그 선택은 이미 기술적이고 정동적인 구조 속에서 정렬되어 있다.

이 구조에서 메시아는 탄생할 수 없다. 메시아가 도착하는 순간 결핍이 사라지고, 결핍이 사라지면 욕망은 멈추기 때문이다. 군중이 원하는 것은 도착한 메시아가 아니라,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은 자리다. 그 자리가 유지될 때 욕망도 계속 흐른다.

결국 군중의 욕망은 결핍 위에서만 지속된다. 그 결핍을 유지하기 위해 군중은 새로운 몸을 호출하고, 감정의 흐름이 고갈되기 전에 다른 표면을 찾는다. 구원은 오지 않는다. 오지 않아야 한다. 결핍은 군중의 생명력이며, 정동의 순환을 멈추지 않게 만드는 은밀한 엔진이다.



10 Ernesto Laclau, On Populist Reason (London: Verso, 2005).
11 Slavoj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 (Cambridge, MA: MIT Press, 2003).
12 Jean Baudrillard, Simulacra and Simulation, trans. Sheila Faria Glaser (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4).


3.3 반복의 장치 — 군중은 어떻게 ‘자기 제의’를 만들어내는가

군중은 단순히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다. 군중은 스스로 감정의 흐름을 설계하고, 제의를 만들고, 그 제의를 반복하며, 그 반복을 통해 자신들의 결핍을 유지한다. 겉으로는 타인의 신체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의 표정을 읽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며, 서로의 반응을 조정한다. 군중은 대상에게 향한 시선보다, 자신들 사이를 오가는 시선을 더 소중히 여긴다. 공동의 감정을 유지하려면 ‘올바른 반응’을 수행하는 서로의 몸짓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감정의 구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의 자율적인 장치처럼 움직인다. 누가 먼저 감정을 느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감정이 먼저 표면 위로 떠오르느냐가 중요해지고, 그 순서는 이미 플랫폼과 미디어, 팬덤과 정치 공동체가 미리 그어놓은 흐름을 따라간다. 군중은 감정을 느낀다기보다, 이미 준비된 길로 자연스럽게 걸어 들어간다. 그 길에서 벗어나는 감정은 쉽게 밀려나고, 흐름에 맞는 감정만이 집단 속에서 자리를 얻는다. 감정은 개인의 내면에서 솟아나기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요구하는 집단적 수행이 된다.

이 수행은 한 번의 폭발로 끝나지 않는다. 군중은 결핍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장면을 만든다. 특정 인물의 몰락이 하나의 끝처럼 보일지라도, 실은 다음 장면을 위한 문이 열리는 순간일 뿐이다. 욕망은 완결을 향하지 않고, 결핍을 붙잡으며 흐른다. 그래서 스캔들은 반복되고, 사건은 빠르게 소비되며, 새로운 서사는 곧바로 자리 잡는다. 군중은 결핍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결핍이 흩어지지 않도록 감정의 무대를 계속 유지한다.

이 반복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은 군중 안에 있다. 예배자는 사라져도 예배는 남고, 스타는 교체되어도 팬덤의 감정 구조는 변하지 않으며, 정치 지도자가 물러나도 ‘분노의 자리’는 여전히 채워져야 한다. 군중은 특정 인물을 향한 숭배나 혐오보다, 그 인물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감정의 구조를 유지하는 데 더 익숙하다. 결핍이 메워지는 순간 욕망은 멈추고, 욕망이 멈추면 군중은 순식간에 흩어져 버린다. 그래서 군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결핍을 지속시키기 위한 제의를 스스로 만든다.

이 구조가 깊어질수록 군중은 더 많은 몸을 필요로 한다. 감정의 연료가 고갈되지 않기 위해 새로운 표면이 필요하고, 다시 흔들릴 수 있는 신체가 등장해야 한다. 군중은 사건을 기다리고, 균열을 기다리고, 무너질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이 기다림은 구원의 도착을 바라는 기다림이 아니라, 결핍이 유지되는 상태를 놓치지 않으려는 기다림에 가깝다. 군중에게 중요한 것은 도착이 아니라 지연이며, 충만이 아니라 미완성이다. 감정은 완결을 거부할 때 더 잘 흐른다.

결국 군중은 스스로 제의를 만든다. 제물은 바뀌어도 제의는 계속된다. 군중은 자신들의 감정을 정렬하는 장치를 만들고, 그 장치를 계속 반복하며, 그 반복 속에서 결핍을 유지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떤 몸은 제의의 중심으로 호출되고, 어떤 몸은 그 호출을 거부하며 구조를 드러내고, 또 다른 몸은 그 구조를 미세하게 어긋나게 만들며 새로운 파열의 장면을 연출한다. 이 균열이 드러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무대와 신체의 정치가 다른 국면으로 넘어간다.







Ⅳ. 드러나는 아포칼립스의 신체들

무언가가 끝난다는 예감은 언제나 조용한 곳에서 먼저 시작된다. 커튼 뒤의 공기, 금이 간 표면, 설명되지 않는 떨림 같은 것들. 세계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장면이 아니라,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드러나는 순간이 더 진짜 아포칼립스에 가깝다. 사람들은 종말을 거대한 폭발로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연약한 신체에서 먼저 작은 균열이 나타난다. 그 균열을 따라가다 보면 오래 숨겨져 있던 질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파괴가 아니라 드러남, 그 미세한 변화가 이 장면의 시작이다.


4.1. 커튼이 걷힐 때 — 아포칼립스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아포칼립스는 늘 종말과 결부되어 말해지지만, 그 말의 중심은 파괴가 아니다. apokalypsis의 본래 의미는 덮여 있던 것이 벗겨지고 드러나는 상태에 가깝다. 세계가 한 번에 끝나는 장면이 아니라, 세계를 지탱해 온 감춰진 질서가 표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나는 이 ‘드러남’의 움직임을 퀴어 신체가 가장 예민하고 정교하게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규범적 사회가 보이지 않게 묻어 둔 폭력과 금기, 욕망의 회로는 퀴어 신체와 마주칠 때 비로소 윤곽을 드러낸다. 그것은 파괴 선언이라기보다, 지금까지 감춰져 왔던 구조를 몸의 감각으로 증언하는 행위에 가깝다.

사회는 언제나 무언가를 숨기면서 유지된다. 무엇을 숨기는가, 어떻게 숨기는가가 곧 그 사회의 질서이고 윤리이고 권력이다. 하지만 어떤 숨김에도 틈이 생기고, 그 틈은 가장 먼저 신체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브 세지윅이 말한 “가려진 채로 기능하는 비가시성”13은 바로 이런 장면을 가리킨다. 사회는 퀴어 신체를 주변부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중심의 규범을 안정시키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주변부의 표면이 가장 먼저 흔들리고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퀴어 신체는 늘 체제의 경계면에 놓이게 되고, 그 경계에서 ‘드러남’이 시작된다. 아포칼립스는 갑자기 떨어지는 사건이라기보다, 경계에서 먼저 감지되는 감각의 변화이며, 그 감각은 늘 신체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다.

나는 이런 장면을 여러 번 보아 왔다. 규범적 언어로는 제대로 옮길 수 없는 몸의 떨림,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 경계에 선 존재들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보내는 신호들. 사회의 중심에서는 보이지 않는 파열의 조짐이 주변에서 먼저 떠오른다. 퀴어 신체가 감당하는 균열은 한 개인의 정체성 문제라기보다, 규범 자체가 얼마나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알려주는 정보에 가깝다. 이 정보는 말보다 빠르고, 이론보다 정확하게 작동한다. 퀴어 신체의 ‘드러냄’은 종말을 예언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사회 구조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디에서 금이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시간의 감각적 기록이다.

그렇기에 아포칼립스는 우리가 익숙하게 상상하는 파국의 스펙터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조용하고, 미세하고, 감각적이다. 금기의 언어가 잠시 느슨해지고, 도덕적 규범이 일시적으로 흔들릴 때, 사회는 자신이 무엇을 숨기고 있었는지를 어쩔 수 없이 드러낸다. 나는 이 순간을 하나의 신체적 사건으로 본다. 숨겨 두었던 질서가 몸을 통과해 외부로 새어 나오는 장면, 억압이 완전히 풀리기 전에 먼저 포착되는 작은 떨림들. 그 떨림이 바로 아포칼립스이다. 아포칼립스는 거대한 붕괴 장면의 이름이 아니라, 무엇이 끝나는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가를 설명하는 말에 가깝다.

퀴어 아포칼립스는 이 ‘드러남’의 감각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준다. 퀴어 신체는 사회가 금지해 온 욕망을 표면으로 끌어올리고, 억압된 폭력의 기억을 몸의 기억으로 되살리며, 규범의 경계를 다시 긋도록 요구한다. 이 신체는 단순히 박해받는 피해자가 아니라, 권력이 숨겨 놓은 구조를 비추는 감각기관이다. 규범적 질서가 얼마나 불안정한지, 어디에서 이미 균열이 시작되었는지는 퀴어 신체의 반응 속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그리고 이 드러남은 사회가 이미 끝났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아포칼립스는 먼 미래의 파국이 아니라, 현재의 작동 방식을 벗겨내어 보여주는 지금-여기의 사건이다.

따라서 퀴어 아포칼립스는 종교적·신화적 이미지로 상상된 세계의 붕괴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오히려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작동이 어떤 폭력의 축적과 금기의 억압 위에서 유지되는지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여준다. 퀴어 신체는 어떤 구원을 약속하지도 않고, 거창한 파괴를 선언하지도 않는다. 그저 드러낼 뿐이다. 숨겨져 왔던 것, 말해지지 않았던 것, 감춰져야만 했던 것들을 끌어올려 보여준다. 그 드러냄 자체가 아포칼립스이고, 그 드러남 속에서 사회는 자신이 유지되는 방식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다.

아포칼립스는 끝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세계가 실제로 움직이는 방식이 비로소 보이는 순간이다. 퀴어 신체는 바로 그 순간의 가장자리에, 커튼이 조금 걷힌 자리에 서 있다. 그 몸에서 먼저 시작되는 작은 떨림이, 모든 드러남의 시작이다.



13 Eve Kosofsky Sedgwick, Epistemology of the Closet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4.2. 가장자리의 열 — 규범은 왜 이 신체에서 먼저 파열되는가

퀴어 신체는 언제나 경계에서 발견된다. 이 경계는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의 외곽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가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쌓아 올린 규범의 압력이 모이는 자리이며, 질서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열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중심은 언제나 안정적이고 평온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의 긴장은 늘 주변에서 먼저 진동을 만들어낸다. 드브레가 말했듯이 세계는 중심에서 보존되고 경계에서 드러난다.14 퀴어 신체는 그 드러남의 표면이 된다.

규범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몸을 안쪽에 두고, 또 다른 몸을 바깥으로 밀어낸다. 하지만 이 경계는 언제나 부서지기 쉽다. 경계는 완성의 지점이 아니라 분류의 실패가 쌓여 흔들리는 층위이기 때문이다. 퀴어 신체는 이 실패의 흔적을 온몸으로 떠안으며 규범적 정체가 얼마나 얇은 기반 위에서 작동하는지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한다. 이 신체는 중심에서 천천히 만들어지는 언어보다 훨씬 빠르게 반응하며, 규범이 무엇을 금지하고 무엇을 숨겨왔는지를 가장 먼저 보여주는 촉각적 표면이 된다.

대중문화와 예술의 장면에서는 이 구조가 더욱 뚜렷해진다. 군중은 스타의 몸을 완전한 이미지로 소비하면서도 그 이미지가 흔들리는 순간을 강렬하게 욕망한다. 번아웃, 실수, 눈물, 고통 같은 파열의 장면을 통해서만 ‘진정성’이라는 이름이 부여된는 이 구조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군중이 억눌러온 욕망이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완전함을 요구하면서도 완전함이 무너질 때 더 큰 감정의 진폭을 얻는 이 모순은 규범이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균열을 필요로 하는지를 보여준다.

퀴어 신체는 이 장면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는다. 이 몸은 규범적 틀을 완전히 수행할 수도 없고 수행하려는 의지도 없다. 바로 이 ‘따르지 않음’이 규범을 불안하게 하고, 그 불안은 곧 규범의 허구를 드러낸다. 버틀러가 말했듯이 규범은 수행되지 않을 때 비로소 자신을 드러낸다.15 퀴어 신체는 이러한 수행 불가능성을 통해 규범의 언어를 낯설게 만들고 감정과 욕망의 배치를 다시 조정하도록 만든다. 군중이 이 신체에 유난히 과도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그 신체가 사회의 욕망 구조를 정확하게 비추기 때문이다.

예술의 역사에서도 이러한 경계의 신체는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론 에이시의 HIV+ 몸, 지나 파네의 상처 난 피부, 리 보어리의 비정형적 변형은 모두 규범적 범주가 신체 위에서 뒤틀리고 새겨지는지를 보여준다. 이 신체들은 금기와 오염이라는 상상의 경계를 그대로 표면 위로 끌어올리며 관객의 시선을 중심에서 경계로 천천히 이동시킨다. 관객은 이 표면을 통해 사회가 어떤 몸을 위험하다고 상상했고 어떤 몸을 희생시키며 질서를 유지해 왔는지를 다시 읽게 된다.

이 구조는 과거 예술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의 군중도 퀴어 신체를 단순히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신체를 통해 자신이 오래 억압해 온 충동과 금기, 결핍을 보게 된다. 그래서 반응은 늘 과잉으로 흘러간다. 매혹은 집착이 되고 혐오는 폭력으로 번지며 공감은 순식간에 경멸로 바뀐다. 이 과도함은 구조의 결함이 아니라 구조 그 자체다. 퀴어 신체는 군중의 감정이 어떻게 배치되고 순환되는지, 즉 욕망의 몸짓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는지를 가장 먼저 드러내는 표면이 된다.

퀴어 신체의 힘은 이 몸이 희생되기 쉬워서가 아니라, 희생의 자리를 요구받을 때 이를 온전히 수행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다.  군중은 어떤 신체에서 ‘대신 흔들릴 결핍’을 기대하지만 퀴어 신체는 그 기대를 비껴나간다. 이 어긋남 자체가 균열이 되고, 그 균열은 사회가 감추어 둔 욕망의 기원을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 이 신체는 무너지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으며, 규범을 재연하지 않아도 작동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체는 세계가 숨겨온 구조를 가장 먼저 드러내는 기관이 된다.

결국 퀴어 신체는 경계에 있기 때문에 취약해 보이지만 바로 그 경계성 덕분에 세계의 압력과 욕망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는 신체다. 이 몸은 규범의 언어보다 먼저 움직이고, 구조가 숨긴 균열을 드러내며, 사회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가장 먼저 포착한다. 이 신체에서 발생하는 파열은 실패가 아니라 정보이며, 폭발이 아니라 진동이고, 파괴가 아니라 시작의 신호다. 세계는 중심에서 안정되지만 변화는 언제나 경계에서 먼저 일어난다. 퀴어 신체는 바로 그 변화의 첫 진동이며, 세계가 가장 먼저 자신을 배반하는 자리다.



14 Régis Debray, Transmitting Culture, trans. Eric Rauth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0).
15 Judith Butler, 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 (New York: Routledge, 1990).


4.3. 고통의 연출 — 사도마조히즘은 어떻게 권력을 재배치하는가

사도마조히즘은 흔히 성적 취향이나 일탈로 축소되지만, 그 본질은 훨씬 더 정치적이고 감각적이다. 그것은 권력이 신체 위에 새겨놓은 명령의 문법을 다시 쓰는 행위이며, 규범적 질서가 숨기려 했던 폭력의 구조를 가장 미세한 감각의 층위에서 드러내는 실험이다. 들뢰즈가 말했듯 마조히즘은 “벌을 구하는 자가 오히려 권력의 문장을 재구성하는 행위”16이고, 푸코는 BDSM 관계 속에서 “권력이 해체되며 다시 배열되는 또 하나의 윤리”17를 보았다. 이 장면에서 고통은 처벌이 아니라 구조를 움직이는 장치가 되고, 쾌락은 욕망이 아니라 권력의 회로를 교란하는 작은 스파크가 된다.

나는 이 구조를 텍스트 속에서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이해하게 되었다. 플레이 속에서 나는 서브미시브의 자리로 들어간다. 겉으로 보기엔 권력을 넘겨준 것 같지만, 그 순간 권력의 중심은 조용히 방향을 바꾼다. 몸이 묶이고 구속된 신체가 되는 순간 공간의 에너지와 감정의 흐름은 모두 이 고정된 몸을 향해 몰려든다. 마스터는 명령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명령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조정하고 계산하며 움직여야 한다. 반면 나는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장면 전체의 흐름을 미세하게 흔드는 축이 된다. 거꾸로 보면, 명령하는 자가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 부딪히는 표면이 장면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마조히즘이 촉발시키는 첫 번째 전복이다.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않고, 신체의 떨림과 긴장이 만들어내는 파동을 따라 다시 그려진다.

사람들은 종종 복종은 복종으로 끝날 것이라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도마조히즘의 서브미시브는 복종을 수행함으로써 지배의 문법을 어긋나게 만든다. 결박된 신체는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의 중심이며, 떨어진 명령은 감각의 회로를 따라 다른 의미로 변환된다. 금지된 쾌락은 규범적 권력의 균열을 드러내고, 고통은 규율의 흔적을 해체한다. 그 순간 신체는 파괴의 대상이 아니라 드러남의 표면이 된다. 종교적 제의가 고통을 통해 질서를 봉합했다면, 이 장면에서 고통은 질서의 틀을 조용히 뒤집는다. 여기서 고통은 미화되지 않고, 희생은 숭고함의 이름으로 포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은 권력을 무력화하는 감각의 돌출이 되고, 희생은 오래된 질서에 대한 은근한 비웃음이 된다. 규범은 그 앞에서 스스로의 연약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때 서브미시브의 몸, 즉 구속된 신체는 단순히 지배받는 존재가 아니다.이 몸은 규범적 권력이 숨겨둔 금기와 폭력의 흔적이 가장 빠르게 응집되는 감각 기관이며, 권력의 무게가 어긋나기 시작하는 첫 표면이다. 명령은 수행되는 과정에서 이미 다른 의미가 되고, 고통은 감각을 재배치하는 도구가 되며, 쾌락은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신체는 스스로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라는 개념 자체를 무력화한다. 권력은 한 지점에 고정되지 않고 신체의 떨림을 따라 수평적으로 흩어진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사도마조히즘은 단순한 성적 행위가 아니라, 권력과 감각, 신성의 구조를 다시 쓰는 하나의 정치신학적 사건으로 자리 잡는다.

사도마조히즘이 만들어내는 장면은 결국 이런 선언을 품고 있다. 권력은 명령하는 자에게 머무르지 않고, 명령이 해체되는 순간을 감각으로 만드는 자에게 옮겨간다. 지배와 복종이라는 틀은 고정된 회로가 아니라, 신체가 어떤 긴장을 생성하고 어떤 감각을 다시 배치하는지 따라 새롭게 그려진다. 서브미시브의 몸, 결박된 신체는 규범의 언어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자리를 열어젖히며 금기의 구조를 뒤집는 감각적 도구가 된다. 이 신체는 고통을 견디는 몸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세계의 문법을 다시 쓰는 몸이며, 오래된 제의가 남긴 잔여를 새로운 질서로 재구성하는 살아 있는 표면이다.



16 Gilles Deleuze, Coldness and Cruelty, in Masochism, trans. Jean McNeil (New York: Zone Books, 1991).
17 Michel Foucault, The History of Sexuality, Volume 1: An Introduction, trans. Robert Hurley (New York: Vintage Books, 1990).


4.4. 신성의 그림자 — 종교적 신체는 왜 항상 흔들렸는가

종교의 역사에서 신성은 언제나 특정한 신체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신은 개념이나 교리보다 먼저 몸을 매개로 세계에 개입했고, 그 몸은 대개 단단하고 완전한 형체가 아니었다. 흔들리고, 열에 들뜬 듯 흔들리고, 이미 상처를 품은 신체를 통해 말하곤 했다. 종교적 신체는 신들을 모시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신성과 폭력이 한몸을 이루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던 하나의 장치였다. 종교는 완벽하게 정돈된 몸을 선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금이 가고, 지쳐 있고, 조율되지 않는 신체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신탁들은 이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남성과 여성 어느 쪽으로도 쉽게 구분되지 않는 목소리, 경계가 흐릿한 몸에서 전해지던 예언은 그 모호함 자체가 신성의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신의 말은 견고한 중심에서 울린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신체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떨림을 통해 도착했다. 그 흔들림은 혼란의 지표가 아니라, 감추어진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샤먼의 신체 또한 이 구조를 반복한다. 샤먼은 생과 사, 병과 치유,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하나의 몸에 여러 층위를 겹쳐 넣는다. 그 신체는 단일한 정체성에 갇히지 않고, 서로 다른 세계가 통과하는 문처럼 흔들린다. 이러한 흔들림은 때때로 병으로 이해되기도 했지만, 공동체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세계의 압력을 대신 받아내는 몸이었다. 중심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주변이 진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종교는 이미 알고 있었다.

기독교 전통에서도 신성은 규범적 신체에 고정되지 않았다. 금욕과 고행을 실천한 성인들의 몸은 경계 위에 놓여 있었고, 때로는 남성과 여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중성적 신체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모호함은 신으로 향하는 또 다른 문을 열었고, 평범한 육체는 감당할 수 없는 어떤 가능성이 그 틈에서 발생했다.

순교자의 몸은 이 구조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고문과 처형 속에서 그들은 단순히 부서진 육체로 남지 않았다. 찢긴 살과 피의 흔적은 초월이 통과하는 길이 되었고, 인간과 신의 세계가 잠시 맞닿는 경계면이 되었다. 신성은 언제나 깨끗하고 단단한 몸이 아니라 이미 침범된 신체, 경계가 흔들린 몸에서 가장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보면 종교가 추구한 것은 신성이라는 개념 그 자체라기보다 신성이 흐르는 방식, 즉 그 흐름을 감당할 수 있는 신체의 구조였다. 그 구조는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정하며, 경계에 놓여 있는 신체였다. 종교적 신체는 완결된 형태보다 균열을 선택했고 중심의 안정보다 경계의 떨림을 통해 세계의 질서를 다시 그렸다.

이 장면은 오늘날의 비규범적 신체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퀴어 신체가 사회적 규범의 경계를 흔들며 숨겨진 욕망과 금기를 드러낸다면, 종교적 신체는 오래전부터 비슷한 방식으로 세계의 균열을 감지해왔다. 서로 다른 시대와 맥락에 놓여 있지만, 두 신체 모두 중심에서 배제된 자리에서 세계의 긴장을 먼저 감각하고, 그 떨림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신성의 몸이 열었던 균열의 공간은 지금도 다른 언어로, 다른 표면에서 반복되고 있다.

종교적 신체는 완전함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 몸은 두 세계가 충돌하는 틈을 견디는 몸이고, 그 충돌을 통해 공동체는 자신이 유지되는 방식을 다시 배웠다. 경계의 신체는 위험해 보이지만, 그 위험에서 종교는 가장 큰 에너지를 얻었다. 신성은 중심에서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경계의 떨림을 따라 스며든다.



4.5. 무너진 중심 — 메시아적 욕망은 어디에서 무너지는가

현대의 정치 장면을 바라보면 지도자는 더 이상 특별한 존재로 등장하지 않는다. 신성함도, 절대적 신뢰도 그들에게 붙지 않지만, 군중은 여전히 그들을 메시아처럼 불러낸다. 믿지도 않으면서 기대하고, 조롱하면서 의존하며, 파괴하면서 다시 호명하는 이 기묘한 반복은 정치적 계산보다 감정의 구조에 가깝다. 군중은 지도자를 사랑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불안을 떠밀어 둘 자리가 필요해서 그 얼굴을 찾는다. 지도자는 구원의 상징이 아니라 감정이 흘러가 머무는 자리처럼 쓰인다.

정치 지도자의 몸은 그래서 의미보다 표정으로 읽힌다. 어떤 정책보다 피로한 눈빛이 먼저 이야기를 만들고, 능력보다 흔들리는 몸의 기미가 더 강한 영향을 남긴다. 성과보다 파열의 장면이 오래 기억되고, 몰락의 순간조차 분노와 호기심을 동시에 끌어당긴다. 군중은 몸서리치며 비판하다가도 다시 바라보고, 무너지는 장면을 소비하고 나면 금세 또 다른 몸을 찾아 움직인다. 오래된 희생의 형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정치의 무대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재작동하는 셈이다. 지도자는 죽음 대신 피로를 떠안고, 피 대신 균열을 내어놓는 존재가 된다. 그 얼굴이 흔들릴 때마다 군중은 잠시나마 자신들의 불안을 잊는다.

이 장면 앞에서 퀴어 아포칼립스는 정치의 내부 어딘가를 꿰뚫는 감각을 드러낸다. 퀴어 신체는 메시아적 서사를 이어갈 필요가 없고, 그 서사가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몸으로 보여주는 신체이다. 구원이 오지 않는다는 감각, 누군가의 희생으로는 세계의 혼란이 정리되지 않는다는 감각, 군중이 원하는 결핍은 어떤 지도자도 대신 감당할 수 없다는 감각이 이 몸을 통해 미세하게 드러난다. 퀴어적 존재 방식은 ‘구원이 없음’을 파국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을 만들어낸다.

슬라보예 지젝이 말했던 “사람들은 메시아를 믿지 않지만, 메시아적 스펙터클 속에서만 세계를 견딘다”18는 문장은 지금의 정치가 왜 끝없는 실패를 순환시키는지 잘 보여준다. 군중은 구원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구원의 형식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무대는 계속 열리고, 희생의 잔상이 되풀이되며, 파열과 회복의 연출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 회로는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난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몸은 이 회로 자체가 이미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묘하게 드러내며, 그 무대의 근본적인 틈을 밝혀낸다.

퀴어 아포칼립스가 말하려는 것은 메시아적 욕망을 부정하는 선언이 아니다. 그 욕망이 무너진 자리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몸을 보여주는 일이다. 구원이 오지 않아도 세계는 계속된다는 감각, 질서가 한 번 무너져도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 희생 없이도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미세한 흔들림이 퀴어 신체의 표면에서 드러난다. 이 신체는 기존 정치의 대체재가 아니라, 다른 정치가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지를 감각으로 알려주는 장치다. 메시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희생을 반복하지 않고도 세계를 견딜 수 있는 새로운 감정의 질서가 펼쳐질 수 있다는 신호가 된다.



18 Slavoj Žižek, The Puppet and the Dwarf: The Perverse Core of Christianity (Cambridge, MA: MIT Press, 2003).


4.6. 제단의 반전 — 퍼포먼스는 어떻게 제의를 폭로하는가

무대는 언제나 눈부신 표정을 하고 등장하지만, 그 표면 아래에는 오래된 제의의 장치가 아직도 미세한 박동을 이어가고 있다. 조명은 축복처럼 쏟아지다가 어느 순간 사람들을 향해 심판의 칼날처럼 내리꽂히고, 사운드는 환희와 압박을 오가며 집단의 감정을 묶어낸다. 기술은 모든 것을 깔끔하게 연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쪽을 따라가 보면 고대의 제단이 사용하던 원리가 거의 그대로 살아 있다. 공연은 종교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남긴 구조를 더 매끄럽고 예민한 감각의 언어로 이어 쓰는 세속적 의례다. 리처드 셰크너가 말한 “공연은 제의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문장은 지금의 무대에서 더 이상 비유로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엔터테인먼트라 믿어온 장면은 사실 감정과 권력을 조정하는 장치다.

현대의 무대는 언제나 한 신체를 중심에 두고 감정의 질서를 정렬한다. 아이돌의 무대, 집회와 시위, 생중계의 프레임, 스캔들의 확산, 사과문의 반복까지 모두 한 사람의 몸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고대의 제의가 상처 난 신체에서 공동체의 안정을 찾았다면, 오늘의 무대는 피 대신 피로와 번아웃, 노출과 파열 같은 현대적 고통을 그 자리에 세운다. 피가 흐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력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뿐, 구조는 여전히 희생과 반복의 리듬을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퀴어의 몸이 무대에 들어서는 순간, 이 장치는 더 이상 예전의 방식으로 굴러가질 못한다. 퀴어 신체는 단순한 이미지의 겉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호출되고 소비되는지를 정확히 아는 몸이다.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규범이 가장 희미해지는 지점에서 정치가 시작된다”는 문장은 바로 이 장면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퀴어 신체는 규범이 흔들리는 그 취약한 틈을 넓히며, 제의의 기하학 자체를 비틀기 시작한다. 고전적 제물은 자신의 역할을 모른 채 의례의 일부가 되지만, 퀴어 신체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앎’이 의례를 완결되지 못하게 만들고, 군중은 자신이 의존하던 정서적 기둥이 흔들리는 순간을 무대에서 직접 목격한다.

볼룸 문화는 이 균열을 가장 노골적으로 실천한다. 보깅의 기묘한 각도, 손목이 꺾이는 리듬, 팝핑의 찰나적 충돌, 카메라를 찢고 지나가는 시선은 단순한 춤이 아니라, 사회가 쌓아온 경계를 제 손으로 찢어내는 움직임이다. 호세 무뇨스가 말한 “퀴어는 미래의 잔여가 아니라 지금의 균열”이라는 문장은 볼룸의 신체에서 정확히 구현된다. 이 세계에서는 중심이 주변부로 이동하고, 주변부가 중심의 역할을 대신한다. 볼룸의 신체는 규범이 상상한 세계의 순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존재 그 자체로 구조를 흔든다. 무대는 이를 버텨내지 못하고 감정의 흐름을 잃는다. 감정의 위계는 풀려나고 방향은 더 이상 예측할 수 없다.

드랙의 신체는 또 다른 방식으로 무대를 뒤흔든다. 드랙은 모방의 기술이 아니라, 젠더라는 구조의 속살을 뒤집어 보여주는 해부학적 수행이다. 가발, 패딩, 보석, 립스틱, 과장된 힐은 장식처럼 보이나, 사실 젠더의 기호들을 과잉까지 밀어붙여 그 구조를 뒤틀어버리는 조형적 전략이다.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바가 말한 “경계에서 솟아오르는 매혹과 기이한 감정”은 드랙의 몸에서 가장 예민하게 살아난다. 관객은 웃고 즐기지만, 그 웃음 밑에서는 자신이 평생 당연하게 여겨온 성별의 틀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직감한다. 드랙의 몸은 젠더가 하나의 연극에 가깝다는 사실을 너무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샤먼의 몸은 이 균열을 더욱 깊은 곳까지 확장한다. 샤먼은 하나의 자아로 고정되지 않고 여러 세계가 드나드는 통로가 된다. 병과 치유, 죽음과 삶,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오가며 발생하는 진동은 무대를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세계의 막이 순간적으로 찢어지는 신적 장면처럼 만든다. 이 몸은 규범이 감당하지 못한 감각을 그대로 드러내며, 무대가 구축해온 구조를 천천히 해체한다.

이렇게 퀴어, 드랙, 샤먼의 신체가 무대에 들어오면 무대는 더 이상 안정적인 제단으로 남을 수 없다. 감정의 흐름은 배치된 순서를 벗어나고, 의례의 규칙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흔들린다. 군중은 자신들이 따라온 정서의 리듬이 어느 순간 낯선 진동으로 바뀌어버린 것을 감지한다. 무대는 오락의 공간에서 폭로의 공간으로 바뀌고, 숭배의 호흡은 균열의 떨림으로 바뀐다.

무대는 이 떨림을 견디지 못해 서서히 흔들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오래된 제의의 구조가 드러난다. 정동의 회로는 잠시 자리를 잃고, 오래도록 유지되던 규범의 기계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군중은 자신을 이끌던 리듬이 어디로도 데려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대 위의 침묵은 깊은 공백처럼 가라앉는다.

그 공백은 새로운 질서를 약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조가 잠시 멎어 있는 자리이며, 세계가 그동안 감추어온 언어를 더는 유지할 수 없는 틈이다. 이 틈에서 무대의 신체는 구원을 말하지 않고, 전망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조용히 드러낸다. 그 드러냄이 남긴 잔향 속에서 우리는 오래도록 자연스러운 질서라 믿었던 감정의 장치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었는지를 똑바로 보게 된다. 무대의 신체는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전의 방식으로는 세계가 더 이상 봉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조용히 알려줄 뿐이다.



19 Richard Schechner, Performance Theory (London: Routledge, 1988).
20 Judith Butler, Bodies That Matter: On the Discursive Limits of “Sex” (New York: Routledge, 1993).
21 José Esteban Muñoz, Cruising Utopia: The Then and There of Queer Futurity (New York: NYU Press, 2009).

22 Julia Kristeva, Powers of Horror: An Essay on Abjection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2).


4.7. 폐허의 감각 — 새로운 감각적 질서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종말은 흔히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지는 장면으로 상상되지만, 퀴어적 감각 속에서 종말은 파괴가 아니라 틈에 가깝다. 그 틈이 벌어지는 순간, 신체는 이전에 가려져 있던 방식으로 세계를 만지고 듣고 호흡한다. 메시아적 질서가 멈추는 자리에 신체는 그 공백을 처음으로 자신의 감각으로 채우기 시작한다. 폐허는 잔해보다, 잔해 사이를 스치는 바람에 더 가까운 감정이다.

호세 무뇨스가 말한 “퀴어 유토피아는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작은 균열에서 감지되는 미세한 가능성”이라는 문장은 이 순간의 결을 가장 잘 짚어낸다. 유토피아는 완전한 지평이 아니라 감각을 재배열하는 몸의 움직임과 유사하다. 종말 이후의 신체는 기다림 속에서 미래를 꿈꾸지 않고, 기다림이 멈춘 자리에서 세계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자신을 구해줄 힘을 찾기보다, 스스로의 표면에서 새 질서를 시험한다.

종말 이후의 신체는 더 이상 누군가의 무게를 대신 들지 않는다. 타인의 불안을 끌어안고 무너지는 역할에도 매달리지 않는다. 희생을 요청받는 순간이 줄어들수록 신체는 오히려 또렷하고 단단한 감각의 결을 드러낸다. 세계가 자신에게 기대던 무게를 내려놓자, 신체는 자신만의 리듬으로 다시 움직이고, 그 움직임 속에서 새로운 윤리가 만들어진다. 고통을 분배하던 낡은 구조가 멈춘 자리에서 신체는 감각을 통해 다른 관계의 틀을 세운다.

여기에서 감각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재료가 된다. 호흡의 깊이, 손끝의 온도, 피부 사이로 흘러드는 공기의 속도, 서로 맞닿는 뼈의 리듬 같은 아주 작은 신호들이 세계의 질서를 다시 세운다. 외부에서 내려오던 질서가 사라지면 세계는 감각의 층위에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어떤 몸은 서로에게 새로운 기관이 되고, 어떤 감각은 타인의 감각과 연결되며, 관계는 체온과 진동으로 다시 배열된다. 취약함은 더 이상 결핍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의 재료가 된다.

종말 이후의 신체는 완전함을 꿈꾸지 않는다. 방향이 흐릿해진 경계, 흠집 난 표면, 반복해서 다시 쓰이는 구조, 여러 층위가 겹쳐진 피부 같은 특성들이 새로운 지속을 가능하게 한다. 이 신체의 힘은 단단함이나 매끄러움에 있지 않고, 변화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다시 만들 수 있는 여지가 곧 생명력이 된다. 이 신체는 구원을 거부하는 존재가 아니라, 구원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계속 살아가는 법을 아는 몸이다. 감각을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계속 이어 나간다.

종말은 끝의 선언이 아니다. 이전의 질서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드러남을 감당할 수 있는 감각적 윤리는 언제나 몸에서 시작된다. 몸은 이전보다 느리게, 그러나 더 정확하게 세계를 만진다. 폐허의 감각 속에서 탄생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감각이다. 그 작은 떨림이야말로, 희생의 시대가 끝난 자리에서 시작되는 첫 움직임이다.



23 José Esteban Muñoz, Cruising Utopia: The Then and There of Queer Futurity (New York: NYU Press, 2009).






Ⅴ. 떨림 이후의 세계

희생의 구조를 거부하는 일은 세계를 등지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가 고통을 배치해 온 방식을 다시 들여다보려는 작은 결심에 가깝다. 우리가 너무 오래 자연스러운 질서라고 믿어온 정동의 회로를 잠시 멈추어 보겠다는 시도이며, 그 회로가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를 조용히 되묻는 움직임이다. 이 글의 여러 장면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세계는 왜 지금도 누군가의 몸을 소모하며 안정의 징표로 삼는가, 그리고 그 소모가 멈춘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희생을 버린다는 것은 구조를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라, 구조가 요구해 온 반복을 더 이상 무심하게 수용하지 않으려는 몸짓이다.

무대의 신체는 이 결심이 처음으로 시험되는 장소였다. 그 몸은 군중의 감정이 비롯되는 표면이었고, 과로와 균열이 미학적 장면으로 재가공되는 중심이었으며, 고통이 서사로 포장되는 회로 안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몸은 이 장치들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가장 민감하게 보여주는 감각의 막이기도 했다. 사도마조히즘의 문법, 아이돌 신체의 표면성, 샤먼의 진동은 세계를 전복하기 위한 영웅적 제스처가 아니라 이미 작동 중인 기술을 낯설게 만드는 실천이었다. 세계를 뒤집지 않고, 세계의 언어를 조금 비틀어 놓음으로써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감정의 질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무대 위의 몸은 희생을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희생을 가능하게 하던 구조 자체를 천천히 드러내는 분석의 도구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과정을 지나온 뒤에 남는 신체는 어떤 모습일까. 완결된 형태를 꿈꾸는 몸이 아니다. 구원을 약속할 필요도 없다. 균열을 품고, 결함과 흔들림을 안고 있으면서도 계속 재작동할 수 있는 몸이다. 이 몸은 결핍을 숨기지 않고, 흔들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규범의 경계에서 감각을 새로 조립하려는 방식을 선택한다. 몸이 다시 작동한다는 것은 새로운 이름을 얻는 일이 아니라 감각의 배열 자체를 바꾸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일이다. 세계가 요구해 온 역할을 잠시 멈추고 스스로의 감각에 따라 세계를 다시 배치해 보는 몸. 바로 그 미세한 재배치가 종말 이후의 윤리가 되고 폭력적 구원을 대신하는 감각의 정치가 된다.

종말은 파국이 아니라 틈이다. 기존의 질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며,그 틈에서 몸은 비로소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퀴어한 가능성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작은 균열 속에서 감지된다. 다른 세계는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 어딘가에서 작게 진동하고 있으며, 그 진동을 알아차리는 감각이 새로운 세계의 첫 구조가 된다. 이 감각은 뛰어난 지도자나 구원의 몸이 아니라, 구조가 감추어 둔 장치를 드러내고 반복되는 규범을 살짝 헐겁게 만들 수 있는 어느 신체의 것이다.

지금 필요한 몸은 누군가의 고통을 대신 떠안을 몸이 아니다. 세계가 어떻게 고통을 만들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몸, 희생의 회로가 어떤 논리로 자신을 유지해 왔는지를 가볍게 비트는 몸, 이미 주어진 감정의 언어를 다른 리듬으로 배열해 보는 몸이다. 이 몸은 흔들리고 균열나고 때로 파열되지만, 바로 그 흔들림 속에서 세계는 아주 잠시 다른 속도를 배운다. 균열을 견딜 수 있는 신체는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다. 세계가 다시 움직이기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다시 움직이는 방식을 찾는다.


구원은 오지 않는다. 그러나 몸은 다시 작동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움직임 속에서 세계는 잠시나마 자신도 몰랐던 감각의 결을 느낀다.